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동물농장》이 다시 던진 질문
35년 동안 조직을 위해 묵묵히 내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며 살아왔지만, 정년을 앞둔 지금 문득 '나의 맹목적인 성실함이 정작 내 자신의 삶과 미래까지 지켜주었는가'라는 씁쓸한 의문이 가슴 한구석을 울렸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다시 읽고, 직장인이 지나온 조직 생활을 돌아보며 맹목적 희생을 넘어 깨어 있는 지혜로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하게 된 솔직한 독서 서평입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다시 펼친 것은 35년 가까이 이어온 직장생활을 한번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년과 은퇴를 앞두고 지나온 조직생활을 생각하다 보니, 젊은 시절 읽었던 이 책이 문득 떠올랐다.
지난번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를 읽고 여유와 다정한 소통의 기술을 다짐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으며 35년 동안 여러 조직의 흥망성쇠와 리더십을 직접 지켜본 뒤 비로소 눈에 들어온 조직의 본질과 내 삶의 방향을 깊이 돌아보게 되었다.
청년 시절의 《동물농장》은 내게 정치적 풍자와 권력의 부패를 다룬 우화 정도로 남아 있었다. 줄거리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지금 다시 읽는다고 해서 얼마나 새로운 생각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다. 하지만 35년 동안 여러 조직의 흥망성쇠와 리더십의 변화를 직접 지켜본 뒤 읽으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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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책 《동물농장》표지 |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문장은 역시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였다.
처음에는 모두가 함께 잘살자는 명분으로 시작했지만, 권력을 차지한 돼지들은 어느새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원칙을 바꾸고 특권을 누린다. 나는 이 장면을 단순히 정치권력의 이야기로만 읽을 수 없었다. 조직에서도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로 시작했던 혁신이나 프로젝트가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편입되고, 처음의 명분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더 마음에 남은 것은 권력을 가진 돼지들보다 복서였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묵묵하게 일하지만, 자신의 상황을 의심하거나 질문하지 못한 채 결국 버림받는 말이다.
복서를 보면서 지난날의 나와 동료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조직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지 않고 일했던 사람들이 정작 조직을 떠나는 순간에는 쓸쓸함을 느끼는 모습을 보아왔다. 성실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내 삶까지 지켜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35년의 성실함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책을 읽은 뒤 내가 실제로 바꾼 것은 거창한 행동이 아니었다. 남은 직장생활에서 조직이나 다른 사람이 정해준 명분과 기대에 나를 무조건 맞추기보다, 그것이 내 삶의 가치와 원칙에 맞는지를 스스로 묻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조직의 변화나 타인의 평가에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었다. 지금은 한 발 떨어져 내 상황을 바라보려고 한다. 내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왔다는 사실은 그대로 인정하되, 나 자신을 조직의 부속품처럼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35년이라는 시간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동안의 노동과 성실함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 시간 자체가 앞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경험과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동물농장》의 시선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이 어떻게 타락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조직을 지탱하고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애써온 평범한 사람들의 진정성까지 지나치게 회의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계심은 필요하지만 사람에 대한 신뢰와 희망까지 놓아버리고 싶지는 않다.
은퇴 후의 삶에서는 누구의 명분이나 기대보다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다.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일까지 이미 실천한 것처럼 말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기준은 분명해졌다.
맹목적인 성실함을 넘어 깨어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 35년 동안 성실하게 걸어온 삶의 발자취 위에 세상의 본질을 읽어내는 경륜을 더해, 이제는 내 삶의 방향을 내가 선택하고 싶다.
《동물농장》은 오래된 고전이지만, 내게는 과거를 평가하는 책이라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질문하게 만드는 책으로 다시 남았다. 성실하게 살아온 시간은 소중하다. 다만 그 성실함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가끔 멈춰서 바라보는 일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독서에서 오래 생각하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