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쟁의 기억》을 읽고, 오늘의 평화를 다시 바라보다 (전쟁의 기억, 일상의 감사, 인생 2막)
《잊혀진 전쟁의 기억》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역사의 큰 이야기보다 마음에 남은 사람들 (전쟁의 기억)
35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달라졌는지를 직접 겪었다. 예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풍요와 편리함이 일상이 되었고, 이제는 정년과 은퇴를 앞두고 있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내가 누리는 평온한 일상 뒤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세대에게서 간간이 들었던 전쟁 이야기와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런 마음으로 정연선의 《잊혀진 전쟁의 기억》을 펼쳤다. 역사와 전쟁을 다룬 책이라 처음에는 건조한 사실이나 정치적 논쟁을 중심으로 한 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내 시선을 붙잡은 것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 자체가 아니었다. 전쟁이라는 폭력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세월이 흘러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상처였다.
역사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연도와 사건, 정치적 판단을 먼저 떠올린다. 이 책은 그 뒤에 가려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보게 한다. 나는 그 시선이 오래 남았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견뎌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평화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일상의 감사)
책을 읽는 동안 사회생활을 하며 만났던 여러 사람들의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한 사연이나 오래된 상처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 세대에게 들었던 전쟁과 가난의 이야기도 이제는 조금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던 하루를 다시 바라보게 됐다. 출근하고 일하고 가족과 일상을 보내는 평범한 삶도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지키고 싶었던 평화였을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은 뒤에는 일상에서 누리는 안전과 평온에 감사하는 마음을 의식적으로 가져보았다. 은퇴를 앞두고 지루함을 느끼거나 앞으로의 삶이 불확실하게 느껴질 때면, 지나온 세월과 그 세월을 가능하게 한 수많은 희생을 떠올렸다. 그러자 사소한 불평이나 조급함이 조금씩 줄었다. 35년의 직장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다음 시간을 준비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이전보다 겸손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다만 이 책의 묵직함이 늘 편안했던 것은 아니다. 비극적인 기억과 상처를 깊이 들여다보는 만큼 전체적인 분위기가 침울하게 이어져 때로는 감정적으로 버겁기도 했다. 역사적 아픔을 기억하는 것과 함께 그 상처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희망이나 건설적인 소통의 지혜도 조금 더 이야기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억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인생 2막)
그럼에도 책을 덮고 나서 한 가지 생각은 분명해졌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되풀이해서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60대에 접어들어 인생의 다음 장을 준비하는 지금, 역사 속 아픔을 단순한 옛이야기로 넘기기보다 내가 누리는 현재의 삶을 돌아보는 기준으로 삼고 싶다. 앞선 세대의 희생 위에 놓인 평화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책임일 것이다.
아직 책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삶으로 옮긴 것은 아니다. 은퇴 후에는 우리 사회의 역사와 소외된 사람들의 잊혀가는 기억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보고 싶다. 그동안 살아오며 쌓은 경험과 글쓰기를 바탕으로 사라져가는 가치와 다정한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나누는 일도 해보고 싶다.
35년 동안 성실하게 일터를 지켜온 삶의 발자취 위에 이제는 역사를 바라보는 깊은 시선을 조금 더 얹어보고 싶다. 인생 2막을 거창하게 시작하기보다, 내가 누리는 하루를 귀하게 여기고 지나간 아픔을 잊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다. 《잊혀진 전쟁의 기억》은 내게 과거를 알려준 책이라기보다, 오늘의 평화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 책으로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