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으며, 35년의 항해를 돌아보다 (세대의 재독, 삶의 성과, 인생 2막)

청년 시절 노인과 바다를 처음 읽었을 때는 이 작품이 익숙한 고전 가운데 하나였다. 학교 수업이나 필독서를 통해 줄거리도 알고 있었고, 산티아고라는 늙은 어부가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환갑을 지나 다시 이 책을 펼쳤을 때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읽는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산티아고의 모습이 예전과 달랐다. 35년 가까이 일터를 지켜오고 정년과 은퇴를 눈앞에 둔 지금의 나에게 그는 단순히 고기를 잡는 노인이 아니었다. 지나온 내 삶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세대의 재독, 삶의 성과, 인생 2막
세대의 재독, 삶의 성과, 인생 2

끝까지 키를 놓지 않는다는 것 (세대의 재독)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문장은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는 산티아고의 생각이었다. 사흘 동안 청새치와 싸우고, 어렵게 잡은 물고기를 상어 떼에게 빼앗기는 과정은 단순한 승리와 패배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가 받아들인 핵심은 결과가 사라지더라도 그 결과를 만들어내기까지의 태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35년의 직장 생활을 돌아보면 나에게도 거대한 청새치 같은 목표가 있었다.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만들었지만, 애써 일궈놓은 것이 예상하지 못한 시련 때문에 허무하게 사라진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면 빈손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억들이 산티아고의 지친 손마디와 겹쳐졌다. 젊었을 때였다면 이 장면을 불굴의 의지정도로 읽었을지 모르겠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오래 버티며 자신의 자리를 지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피로와 묵직함이 느껴졌다.

성과가 사라져도 남는 것 (삶의 성과)

책을 다시 읽은 뒤 은퇴를 앞두고 내 안에 있던 상실감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35년 동안 해온 일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하는 허탈함에서 한 걸음 물러나 보기로 했다.

눈에 보이는 성과나 다른 사람의 평가만 놓고 지난 시간을 판단한다면 아쉬운 부분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아침 다시 일터로 나갔던 시간, 맡은 일을 해내기 위해 견뎠던 날들까지 성과의 크기로만 평가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은 업무를 대하는 태도도 조금 바꾸었다. 조급하게 무언가를 더 증명하려 하기보다 내 호흡과 템포를 유지하면서 지금 해야 할 일을 정갈하게 다듬었다. 특별한 사건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은 분명 달라졌다. 결과에 매달리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고, 35년 동안 성실하게 버텨온 나 자신에게 묵직한 자부심을 느끼게 됐다.

물론 산티아고의 방식을 전부 받아들이고 싶은 것은 아니다.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고 신체적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그의 투쟁은 내게 다소 비장하고 가혹하게 느껴졌다. 나는 오랜 세월 조직과 가정 안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치열하게 버티는 것만큼 때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쉬는 일, 주변 사람들과 온기를 나누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다른 바다로 간다 (인생 2)

이번 재독에서 내가 얻은 것은 새로운 성공의 방법이라기보다 지나온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가까웠다. 산티아고가 뼈만 남은 물고기를 끌고 돌아왔다고 해서 그의 항해 전체가 실패가 아니었던 것처럼, 나의 35년 직장 생활도 눈에 남는 성과만으로 평가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제 정년과 은퇴라는 커다란 마디를 앞두고 있다. 예전에는 직장을 떠난다는 사실이 곧 무언가를 잃는 일처럼 느껴졌다면, 지금은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됐다. 60대는 세월에 밀려 퇴장하는 시기가 아니라,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노련함을 가지고 새로운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때일 수도 있다.

아직 은퇴 후의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정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기억하고 싶다. 앞으로 어떤 변화와 시련을 만나더라도 당황해서 내 키를 놓지는 말자는 것. 산티아고처럼 무조건 자신을 몰아붙이겠다는 뜻은 아니다. 필요하면 쉬고, 사람들과 함께하면서도 내 삶의 방향만큼은 스스로 붙잡고 가고 싶다.

35년 동안 거슬러 온 내 삶의 바다를 돌아본다. 화려한 전리품만 남은 항해는 아니었지만, 그 시간을 성실하게 건너온 나의 노고만큼은 내가 먼저 인정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 다른 바다를 향해, 서두르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노를 저어가려 한다.